
서울 아파트 임대차 시장에서 새로운 집을 찾아 이사하기보다 기존 주택에 계속 거주하는 세입자가 빠르게 늘고 있다. 특히 계약갱신청구권을 사용하지 않고 집주인과 임대료를 새롭게 협의하는 이른바 ‘합의 갱신’이 증가하면서 일부 단지에서는 월세를 두 배 가까이 올리고도 계약을 연장하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반전세 만기가 다가오는데 계약갱신청구권을 사용하면 2년 뒤에는 결국 다시 이사를 고민해야 하잖아요. 차라리 지금 집주인과 협의해 월세를 조금 더 내고 계속 살기로 했습니다.”
서울 송파구에 거주하는 40대 세입자의 얘기다.
실제로 서울 아파트 전월세 시장에서는 최근 이 같은 선택을 하는 세입자가 늘어나는 모습이다.
■ 서울 전월세 계약 절반 이상이 ‘갱신’
14일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시스템에 따르면 지난 8월 서울 아파트 전월세 계약은 지난 11일 기준 총 1만4089건으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기존 계약을 연장한 갱신계약은 7233건으로 전체의 51.3%를 차지했다.
올해 들어 월별 갱신계약 비중이 50%를 넘어선 것은 처음이다.
올해 1월 서울 아파트 전월세 계약 가운데 갱신 비중은 44.2%였다. 이후 2월 45.9%, 3월 45.2%, 4월 41.8%, 5월 45.9%, 6월 44.5% 등 대체로 40%대 중반 수준을 유지했다.
그러나 7월 46.4%로 올라선 데 이어 8월에는 51.3%까지 뛰었다.
올해 1~8월 전체 전월세 계약 15만3927건 가운데 갱신계약은 6만9873건으로 45.4%를 차지했다.
■ 갱신청구권 안 쓰고 집주인과 직접 협상
더 눈에 띄는 것은 계약갱신요구권을 사용하지 않은 갱신계약이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8월 갱신계약 7233건 가운데 계약갱신요구권을 사용한 것으로 신고된 계약은 2870건으로 39.7%에 그쳤다.
나머지 4363건은 청구권 사용 표시 없이 계약을 연장했다. 전체 갱신계약의 60.3%다.
이른바 ‘합의 갱신’이다.
세입자가 법적으로 보장된 계약갱신청구권을 행사하는 대신 집주인과 보증금이나 월세 등 새로운 조건을 협의해 계약을 연장하는 방식이다.
합의 갱신 비중은 올해 1월 53.5%에서 3월 60.1%까지 상승했다가 다시 50%대로 내려왔지만 8월 들어 다시 60%를 돌파하며 올해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 월세 80만원→160만원…두 배 올리고도 재계약
문제는 합의 갱신 과정에서 임대료가 큰 폭으로 오른 계약도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8월 합의 갱신 가운데 기존 계약과 보증금이 동일하고 이전 및 현재 월세를 모두 확인할 수 있는 1107건을 분석한 결과, 829건에서 월세가 상승했다.
전체의 74.9%에 해당한다.
월세가 기존보다 50% 이상 오른 계약도 100건으로 9.0%를 차지했고, 월세가 두 배 이상 상승한 계약도 41건(3.7%)에 달했다.
실제 서울 성동구 옥수동 ‘옥수파크힐스’ 전용면적 84㎡에서는 보증금 8억원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월세가 기존 80만원에서 160만원으로 두 배 상승한 갱신계약이 체결됐다.
계약갱신요구권을 사용한 것으로 신고되지 않은 계약이다.
송파구 장지동 ‘위례중앙푸르지오1단지’ 전용 84㎡ 역시 보증금 4억원은 그대로 유지했지만 월세는 기존 70만원에서 140만원으로 두 배 올랐다.
고가 월세 계약에서도 큰 폭의 상승 사례가 확인됐다.
송파구 가락동 ‘헬리오시티’ 전용 84㎡에서는 보증금 5억원·월세 166만원이던 계약이 보증금은 그대로 둔 채 월세 325만원으로 갱신됐다.
월세 상승률만 95.8%에 달한다.
강동구 암사동 ‘롯데캐슬퍼스트’ 전용 133㎡ 역시 보증금 3억원을 유지하면서 월세가 175만원에서 330만원으로 88.6% 상승했다.
■ 전세도 예외 아니다…4건 중 1건은 10% 넘게 올라
임대료 상승은 월세 시장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8월 합의 갱신 가운데 이전과 현재 계약 모두 월세가 없는 순수 전세이면서 기존 보증금을 확인할 수 있는 계약은 총 2107건이었다.
이 가운데 보증금이 기존보다 5% 넘게 상승한 계약은 766건으로 전체의 36.4%를 차지했다.
특히 보증금이 10%를 초과해 오른 계약도 500건으로 23.7%에 달했다.
계약갱신청구권을 행사할 경우 임대료 인상률은 원칙적으로 5% 이내로 제한되지만, 청구권을 사용하지 않고 임대인과 임차인이 새로운 조건에 합의하는 경우에는 이 제한을 적용받지 않는다.
이에 따라 주변 시세를 반영해 보증금이나 월세를 크게 조정하는 계약이 늘어난 것으로 풀이된다.
■ 강서구는 전월세 3건 중 2건이 재계약
지역별로 살펴보면 갱신계약 증가세는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8월 강서구에서 체결된 전월세 계약 1225건 가운데 827건이 갱신계약이었다. 갱신 비중은 67.5%에 달했다.
전월세 계약 3건 가운데 2건가량이 기존 세입자의 재계약인 셈이다.
송파구 역시 전체 1078건 가운데 665건이 갱신되면서 갱신 비중이 61.7%를 기록했다.
이어 구로구 59.9%, 서초구 57.9%, 중랑구 57.4% 등의 순으로 갱신계약 비중이 높았다.
특히 합의 갱신만 놓고 보면 지역별 차이가 더 컸다.
중랑구에서는 갱신계약 384건 가운데 322건, 83.9%가 계약갱신청구권 사용 표시가 없는 계약이었다.
구로구 역시 합의 갱신 비중이 83.4%, 강서구는 79.7%에 달했다. 서울 전체 평균인 60.3%를 크게 웃도는 수준이다.
■ “5% 제한보다 이사비가 더 부담”…달라지는 전월세 시장
서울 전월세 시장에서 합의 갱신이 늘어나는 배경에는 세입자들의 현실적인 계산도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전셋집이나 월셋집을 구할 경우 주변 시세에 맞는 보증금과 월세를 부담해야 하는 데다 중개보수와 이사비용까지 추가된다. 자녀 교육이나 직장 출퇴근 때문에 생활권을 쉽게 바꾸기 어려운 세입자도 적지 않다.
결국 기존 집의 임대료가 다소 오르더라도 이사하지 않고 계약을 연장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세입자가 늘어나는 것이다.
반면 임대인 입장에서는 계약갱신청구권의 5% 인상 제한을 적용받지 않는 합의 갱신을 통해 주변 시세에 맞춰 임대료를 조정할 수 있다.
서울 아파트 전월세 계약의 절반 이상이 갱신계약으로 바뀌고 그중 60% 이상이 합의 갱신으로 나타나면서 임대차 시장의 무게중심도 ‘신규 계약’에서 ‘기존 세입자와의 재협상’으로 이동하고 있다.
특히 월세를 두 배 가까이 올리고도 기존 주택에 머무르는 사례까지 등장하고 있다는 점은 서울 세입자들이 체감하는 이사 비용과 신규 임대료 부담이 그만큼 커졌다는 신호로 해석된다.

